4·19는 갔다, 4·19는 온다
- Posted at 2008/04/19 06:23
- Filed under 김진애의 좋은 새벽/정치의 가치
4·19 내 기억은 너무도 어리다.
중부시장 근처 오장동 동네는 온통 뒤숭숭했다.
골목에서 밤늦게까지 안 들어오는 오빠를 기다리던 아버지 모습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골목 입구 전봇대 알전구 밑의 뿌연 불빛 아래서 서성이던 아버지 모습,
발 동동 구르던 엄마의 모습은 뭔지 모를 불안으로 어린 나를 휩쓸어 넣었다.
이 기억 때문인가?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신새벽에 남 몰래 쓴다” 대목에서 나는 가슴이 짜하다. 그래서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신새벽에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대목이 나오면 그 옛날 오빠를 기다리던 골목의 타는 가슴, 동네 골목 곳곳에서 서성거리던 그 타는 목마름이 떠오른다.
당시 수송초등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했단다. 자료사진
‘민주주의라는 네 이름’을 남몰래 쓰지 않아도 되는 지금, 하지만 ‘4.19 가치’는 살아있는가? 국민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 정신은 우리 가슴 어디에 남아 있는가? 시민들은 물론 학생도 어린아이들도 타는 목마름으로 길거리에 나서게 했던 그 설레임은 어디에 있는가?
이번 4.9 총선의 전개와 투표율을 보면, 4.19는 이미 갔다.
그 타오르던 갈증을 이제 타오르는 욕망이 대신하고 있고,
그 높이 들던 우리의 팔 대신 이제 허무하게 수그러든 어깨가 남았고,
그 타오르던 긍지 대신 사그러진 부끄러움이 남았다.
애물단지가 된 민주주의 참여, 욕망에 넘어간 민주주의 투표, 자본화에 물들어가는 유사 민주주의, ‘민주’라는 단어 자체를 부담스러워 하는 민주주의. 참 부끄럽고, 참 허하다.
그러나 4.19는 또 온다. 또 올 것이라 믿는다.
모든 시민은 각자 역사의 기억을 자기 몸 속 어딘가 유전자로 새기고 있다.
***
강북구 수유리에 있는 4.19 묘역은 여러 역사기념공간 중에서도 각별하게 근사하다. 최근에 만든 기념공간들은 ‘너무 크다’는 단점이 있는데, 4.19 묘역은 손에 잡히게 크지 않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겹겹으로 웅장한 산과 어울려 숭고하다. 특히 비오는 날, 안개가 피어오르는 날은 더욱 숭고한 느낌이다.
이번 4.19 의거의 날에 그저 형식적인 기념식만 열리지 않기를.
4.19 정신, 가치, 유전자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기를.
‘설마 신새벽에 네 이름을 남몰래 써야 하는 일은 없겠지?’
최근의 특검 결과들, 집회들에 대한 대응, 무분별한 규제철페에 대한 거리낌없는 강행, 전 정부에서 추진한 균형발전 정책에 대한 무시, 거칠기 짝이 없는 남북 관계, 이권에 굴복하는 미국 관계, 학교 교육의 원칙 무시, 사교육 시장화, 경쟁을 빙자한 우열 구분 등 하루를 멀다하고 쏟아지는 좌충우돌, 권력기관들의 무소불위 행보들을 보면서
이번 4.19는 정말 착잡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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