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많은 국민, 겁 없는 정부
- Posted at 2008/05/10 09:29
- Filed under 김진애의 좋은 새벽/이명박정부
나는 겁이 많다. ‘도대체 겁이라곤 없는 것 같다’라는 다른 사람들의 인상 비평과는 천양지차다. 운전할 때 사람 본성이 드러난다는데 내가 모는 차를 타 본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얌전하냐고 놀란다. 큰길에서는 언제 어디서 차가 튀어나올지 모르고 골목에서는 아이들이나 강아지들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것이 내가 그리는 가상 위기 상황이다.
영화관, 특히 지하 극장에 가면, 나는 비상구부터 확인한다. 피난거리가 영 멀다 싶으면 마음껏 영화를 즐기지 못할 정도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관은 각 층에서 바로 밖과 연결된 공간으로 나갈 수 있는 중규모 영화관이고 제일 좋아하는 것은 역시 야외극장이다.
호텔에 들면 비상구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고층 호텔은 이 점에서 질색이다. 아무리 별 다섯 개 호텔이라도 두꺼운 융단 깔리고 목재 두껍게 발린 좁고 긴 복도를 보면 불안해지는 심리를 떨치기 어렵다. 유럽 여행이나 일본 여행이 좋은 것은 도시 한복판에 집같이 생긴 여관식 호텔이 많다는 점이다. 지방여행에서도 가능한 한 나는 민박식 숙박을 구하곤 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복도식 고층 아파트에서만 살아 봤다. 문제가 생기면 옆집으로 튈 수 있는 ‘대안 길’이 있으니, 엘리베이터 하나, 계단 하나만 있는 계단형 아파트보다 훨씬 안심된다. 결국 고층 아파트를 벗어나 5층 집에 살게 된 것도 내가 워낙 겁이 많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우리 집 옥상에는 튼튼한 밧줄도 준비해 놨고, 그 밧줄을 묶을 단단한 고정 앵커도 설치해 놨다. 비상시에 과연 내가 밧줄을 탈 수 있을 것인지는 영 의심스럽지만.^^
내가 하는 일의 첫째 요건이 ‘안전’이라는 것은 나의 겁 많음과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건축과 도시란 기본적으로 사람의 안전을 지켜 주는 데 그 으뜸 소임이 있으니 말이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는 참 부끄러웠다. 바로 그날 아침 뉴스를 들으며 일본 출장을 갔었는데, 정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는 부끄럽다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였다. 입술이 부르트도록 한동안 잠을 못 이루고 악몽도 꾸며 고통스러웠다. 대학 1학년 때 충무로에서 ‘대연각 화재’ 사건이 발생했는데 마치 9․11 테러 사건 때 세계무역센터에서처럼 사람들이 창문에서 떨어져 내리는 장면이 뉴스를 통해 잡혔었다. 그 사고로 학우 중 하나가 건축 공부를 시작도 못해 보고 가 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사고는 그치지 않는다. 화재 참사, 지하철 참사, 기차 사고, 태풍 피해, 홍수 피해, 화재 사고, 해일 사고, 최근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보령 방파제 너울 파도 사고 등. 규모도 커지고 원인도 다양해진다. 자연재해가 생기는 것이야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여전히 ‘인재’로 피해가 커지는 현상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그리 겁이 없어?”
인재를 겪을 때마다 나오는 말이다. 그렇게 여러 번 당하고도 같은 일로 당하고 또 당하고, 법을 만들고 제도를 뜯어고치고 기구를 만드는데도 안심은커녕 오히려 피해는 느는 것만 같다.
‘겁(怯)’의 한자 뜻은 참 그럴듯하다. ‘마음에 법이 있다’는 해석이 참 그럴듯하지 않은가. 마음속에 진짜 법이 있다면 사람들은 훨씬 더 순리대로 살지 모른다. ‘겁’이란 적어도 인간의 한계 내에서 순리를 따르게 하는 최소한의 덕목일 것이다.
겁과 함께 사는 것이 일본 사람들의 운명이다. ‘무서운 자연’에 대한 겁이다. 태풍, 해일,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지진 등 언제 일어날지 모를 재앙인데, 일본인의 성격에 ‘극도의 긴장감’이 있는 것은 그들의 집단 기억 속에 언제나 재앙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일본인의 집단 성격에 ‘극한의 치밀함과 정교함’이 있는 것도 겁을 이기려는 동기 때문일 것이다.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방편이다.
일본인이 재앙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침착하고 차분한 것도 그만큼 마음에 법도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재앙에 대한 선험적 겁이란 일본인을 가장 일본 사람답게 하는 것이고 겁이란 그들을 지켜 주는 마음의 법도일지도 모른다.(물론, ‘겁’이란 다른 반작용을 낳을 수 있지만, 여기서 그 부작용에 대해서까지 지적하지는 말자.)
겁이란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는 덕목이다. 겁 낸다는 것이 결코 유쾌하지는 않지만 그 겁을 이기기 위해 온갖 조심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의 옥상에 있는 밧줄처럼, 겁을 이겨 낼 밧줄을 준비해두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과연 제대로 겁을 낼 줄 알고 있는가? 혹시 겁 없다고 과시하는 것이나 아닌가? 우리는 겁을 이겨내기 위해서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겁을 이겨 내기 위해서 우리가 준비한 ‘밧줄’은 무엇인가?
미국쇠고기 수입 논란에 대한 국민들의 겁내기, 특히 어린 국민들의 겁내기 현상, 수도권에까지 퍼져버린 조류독감에 대한 겁내기 현상을 보면서, 우려도 크지만 그렇게 겁내고 미리 ‘밧줄’을 준비하려고 하는 태도를 우리 사회에 심어주지 않을까 기대된다.
‘제대로 겁내고 제대로 대비하는 사회’로 만들어 줄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정부’가 가장 겁 많고 신중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국민이 겁을 덜 내고 살 수 있도록 정부가 앞서서 겁내고 앞서서 대비하는 사회가 선진국일 것이다. (사진 0509 청계광장 촛불문화, 오마이뉴스)
이번 미국소고기 전면개방 파동을 보면,
‘겁 많은 국민, 겁 없는 정부’의 대립이다. 이거 거꾸로다. 이래선 안된다.
이제 바꾸어야 한다.
‘겁 많은 정부, 겁 안내도 되는 국민’으로. 이게 순리다.
*** 지난 밤, 청계광장에 갔었습니다. 미국에서 오래 산 주부와 함께. 현장에 간 그 주부.
'울컥'하더라네요. '첫경험'이라고. 며칠 전 백분토론에서 미국의 한 주부가 또박또박 얘기를 하셨었지요. '겁내는 것'은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 아니지요.
어제 현장에서 여러 아는 사람들도 만났고, 또 시민들 중에 저를 알아보는 분들과 인사도 하고... 교복입은 학생들은 줄었지만, 엄마아빠와 같이 나온 학생들이 많은 듯 하더군요. '사진 찍지 마세요!' 하는 학생 연사들 재미있고. '이왕 찍으려면 예쁘게 찍어주세요' 하는 유머에 한참 웃었고. '신문에 나온 담날, 이메일 받고 문자메시지도 받고 했다고 하던데, 어떻게들 아시는 걸까요?
*** 5월 11일 새벽에.
<백분토론>에서 조목조목 담담하게 질문하셨던 이선영 주부가 미국 현지의 아틀랜터 라디오에서 인터뷰하는 것을 콩바구니님의 블로그를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1147208 를 통해 막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보통 주부, 아이들을 생각하고 상식적이고 따뜻하고 가족적인 주부시더군요. 라디오 진행자가 오히려 약간 흥분(자랑스러워서 그러신지...) 하시는데, 이선영 주부는 그저 담담하게 상식적인 얘기들을 하셨습니다.
'한국에 수출될 소고기가 미국 현지 소고기와 다를 위험성이 크다는 사실'에 대해서. 30개월 이상, SRM 부위 문제, 그리고 특히 '육회수공정'(뼈에 남은 살을 발라내는 공정에서 뼈조각이 들어가는 문제, 미국에서도 위험 경고)에서 나온 살까지 수입되지 않느냐고 조목조목 얘기하시더군요. 차분하고 담담하게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근거를 가지고... 우리가 생활속에서 갖는 상식을 중요히 여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선영 주부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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