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성’ 촛불의제와 '공공의 적'
- Posted at 2008/06/16 17:28
- Filed under 김진애의 좋은 새벽/정치의 가치
촛불시민들의 촛불집회는 이제 촛불의제로 발전할 기세다.
‘미국쇠고기’에 더하여 ‘공기업 민영화, 물 사유화, 교육, 대운하, 공영방송 사수’의 의제들이 떠오른다. 근본적으로 ‘공공성’ 의제로 귀결되는 사안들이다.
‘우리 사회에서의 공공성’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 공통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정부, 학교, 기업, 지역, 등 사회 각 부문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공공성에 대한 개인의 책임과 개인의 권리는 무엇인가? 사회의 제도와 시스템은 어떤 얼개를 가져야 하는가? 어떻게 시스템을 정착시킬 것인가? 누가 어떤 방식으로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 어떤 방식을 통해 의사결정을 할 것인가?
이런 모든 의문들이 ‘공공성 촛불의제’에 담겨있다.
(사진은 미국 알버르타의 'public interes' 잡지에서 나온 보육의 공공성에 대한 절규.)
감격이다. ‘공공성’ 의제가 시민의 화두가 될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 너무도 감동적이다.
‘민주주의의 성숙이란 공공성의 가치가 시민의 기본가치로 뿌리내리는 되는 단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절차적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실질적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릴 가능성이 서서히 보이는 것이다.
가슴 설렌다. 민주주의 20년 화두가 이제 공공성 화두로 발전하는가?
***
공공성이란 말은 참 근사한 말이다.
공공(公共)은 ‘열림’과 ‘나눔’을 같이 포함한다.
‘public'이라는 말이 어쩌다 ‘공공’이라 번역되었는지 모르지만, 포털에서 ‘공공성’을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그런 단어 없다고 나온다. ‘공공’을 찾으면 ‘public 또는 common’으로 나온다. 영어 public은 ‘열림 公’, ‘common'은 ‘나눔 共’인데, 우리는 열림과 나눔을 같이 표현하는 ‘공공’을 쓰니 얼마나 멋진가. 공공은 열림(open)과 나눔(sharing)을 같이 포함하는 것이다.
‘공공성’에 가장 가까운 영어 단어는 ‘public interest’다. ‘public interest’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공익’인데, 불행하게도 ‘공익’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지나치게 오염되어 버렸다. 공익근무원이 ‘공익’으로 줄여 쓰이는 판이니, 공익이라는 명제가 어디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일제강점기과 독재를 거친 우리 사회에서 ‘공’이라는 말은 불행히도 태생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고, 안타깝게도 아직도 신뢰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공권력’은 ‘악용’이나 ‘남용’과 떼려야 뗄 수 없고, ‘공공기관’은 ‘비효율성’이나 ‘독과점’이 연상되고, ‘공영개발’은 ‘무리한 수용’과 연관되는 식이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서 ‘공’(公)은 곧 ‘관(官)’으로 인식되고 갖은 특혜, 담합, 불공정성과 연관되었던 것이다. (사진은 이명박 대통령과 대기업회장들과의 연초 회동)
이런 상황에서 ‘공공성’의 가치를 제대로 세워지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의 불행이다. 관치, 관의 편의에 의한 통치, 국가주의적 통치, 편향적 수혜계층에 경도된 정책 등, ‘공’이 남용된 사례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최소한의 ‘공공성’에 대한 사회 논의가 발전하기 어려웠다. (공공성의 기본 전제인 민주주의조차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던 사회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공공성의 가치가 화두로 등장한 것은 지난 참여정부에 들어와서다. 예컨대, 종합부동산세 도입, 공교육 기조 유지, 복지서비스 증대 노력, 공공기관의 지방이전 추진 같은 정책을 통해서다. 세제형평은 경제 공공성이며, 공교육은 국민 기회라는 시간 공공성이고, 복지 서비스는 사회계층 공공성이고, 공공기관 이전은 공간 공공성의 사례들이다.(공공성 부문 중 환경 공공성에 대해서는 참여정부에서 약했던 편이다. 부동산의 벽에 부딪혔던 것도 작용했지만.)
다들 알다시피, 공공성의 가치와 공공부문의 역할을 주장했던 참여정부의 의제는 일방적으로 비판받거나 조롱당했던 셈이고, 국민들도 시큰둥해하거나 반발했었다.
그런데 이제 규제완화와 민영화가 만능으로 여겨지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여지는 이명박 정부에서 오히려 ‘공공성’의 가치가 시민사회로부터 등장하니 정말 감격이다.
이 글에서 공공성의 가치를 자세히 거론하기는 힘들다. 앞으로 나도 차곡차곡 열어놓고 나눌 것이다. 이미 촛불시민들은 공공성의 중요성에 대해서 인식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의견을 열고 나눌 것이다.
두가지만은 꼭 얘기하고 싶다.
첫째, 어떤 정책 변화를 얘기할 때도 당장의 문제 해결 뿐 아니라,
‘공공성’의 기준에 대해서 고민하는 대승적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이다.
둘째, 정부의 기본 역할은 국민을 위한 공공성을 지켜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뢰다.
촛불시민들은 공공성의 촛불의제를 통해 정부의 공공성 상실을 견제하고,
우리 사회의 공공성 가치를 드디어 뿌리내리게 할 것이라 믿고 싶다.
선거라는 절차적 민주주의 정당성을 넘어서 공공성이 바로 선 내용적 민주주의를 기대하며, 이제 우리의 민주주의는 또 다른 발전 단계로 갈 것이라 믿는다.
영화 <공공의 적>, 공공이 공공의 적이 되어버리면 어떡하나?
영화 <공공의 적>이 다시 돌아온단다. 1.5 버전으로 <강철중>이란 제목으로 이번 주 공개한단다. 첫 편은 설경구의 마력에 빠져서 봤고, 둘째 편은 영 긴장감이 떨어졌었는데, 이번 1.5 버전은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하다.
경찰이란 ‘공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칫하면 ‘공권력의 남용의 덫’에 빠질 수 있는 입장에 있다.
말하자면 공공에 있으면서도 공공의 적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그 어떤 순간에 그 경찰 강철중은 스스로의 덫에서 빠져나와 ‘공공의 적’에 분노하게 될까?
**** 080616 김진애 생각.
일이 풀리기는 커녕 점점 더 꼬이고, 화물연대 파업, 건설덤프 파업, 미국 쇠고기협상 잠정 중단, 청와대와 내각의 인적 쇄신이나, 정책 쇄신은 전혀 실마리가 안잡히고, 점점 답답해집니다. 그 와중에 공기업 구조조정이니, 물 산업법, 언론통제 관련 제도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옵니다. 나오는 사안들마다 속을 뒤집어놓고, 전혀 공론화 기미는 없고, 국회가 개원된들 더 답답해질 공산도 크고, 대보수연합이라 말만 안하고 있지만, 무언가 사방에서 그물을 치고 있는 것 같고... 그나마 가장 시원한 소식이 '춧불의제를 본격적으로 6대의제'로 삼아서 '공공성'에 대한 논의를 열겠다는 시민단체들의 각오였습니다. 분명 민주주의는 앞으로 가겠지요?
하여튼 정부, 빨리 할 것은 빨리 하고, 서두르지 않을 것은 서두르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 우선순위를 잘 잡는게 정말 필요할 때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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