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의 자라기, 대학의 자라기
- Posted at 2008/02/22 13:15
- Filed under 자라기 멘토링/멘토링
내가 학생으로서 체험해 본 대학은 두 곳이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과 미국 MIT대.
서울공대 시절은 솔직히 그리 재미없었다. 1970년대 유신시절이어서 학교가 반은 문은 닫았기 때문도 있다. 공부냐 데모냐 사이에서 학교 다니는 이유를 모르겠던 시절이었다. 무엇을 배운다는 느낌도 별로 없었다.
반면 MIT 다니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배우기밖에는 없었다. 1980년대에 우리 나라의 대학은 더욱 힘든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죄스런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학업에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하기도 했었다.
심정적으로 나는 MIT에 꽤 고맙게 느낀다. 실리적인 이유가 크다. 등록금 비싸기로 유명한 학교이지만 석-박사 과정 중 프로젝트와 가르치기를 통해 상당한 학자금 지원을 받았다. 모자라는 생활비는 학교에서 주선한 은행융자를 받았고 졸업 후 7년에 걸쳐 갚을 수 있었다. 당사자가 죽거나 병으로 일할 수 없게 되더라도 보증인에게 그 빚이 돌아가지 않는 ‘개인 책임제 융자’가 더없이 고마웠었다. 독립감이란 역시 좋은 것이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이른바 ‘모교’라는 서울공대 보다 ‘더부살이’한 남의 나라 대학에 먼저 학자금 기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도 그만큼 실제적인 도움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묻곤 한다. 서울대 출신이라는 ‘학연 덕’을 보지 않았느냐고. 글쎄다. 아마도 ‘한국 남자’들에게나 적용되는 학연 덕 아닐까. 여자인 나는 학연과는 전혀 무관했다. 오히려 부담스러웠던 적이 더 많았다. 아무 데나 아무 일이나 시켜주지 않는 것도 체험했다.
‘좋은 학벌이란 오히려 멍에가 될 수 있다.’
실무세계를 체험하고 체득한 교훈이다.
그러나 서울공대 시절에 대해서 내가 전폭적으로 고마워하는 것도 있다. 학교에서 별로 ‘공부 닦달’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학교 밖에서 하고싶은 것을 신나게 할 수 있었다. 내 직업상 학교 안 보다는 실제세계에서 배우는 것이 더 많으니 오히려 대학 시절 지나치게 학교 공부에 쫓기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긴 프로인생에서는 더 좋았던 것 같다.
요새 대학생은 학교 공부 자체에 엄청 쫓긴다. 왜 그렇게 이수과목들은 많으며 또 가외로 공부하는 게 많은 지. 그렇게 해야 직장을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여러 재주를 갖추어도 취직하기 어려운 경제불황시대이고 보면 과연 대학은 가야하는 건지, 이른바 ‘좋은’ 대학이란 것이 필요한 건지,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나지 않을 수 없다.
1. 도대체 대학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
자라기 능력이 필요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지식과 기술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나오므로 학교에서 배운 것은 어차피 곧 낙후되기 때문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현상이다. 그만큼 지식의 혁신속도가 빨라진다. 이런 와중에서 지식 자체를 당장 얼마나 갖고 있는가 보다는 어떻게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취하고 택할 것인가가 실무세계에서 더 중요한 능력이다.
둘째 이유는 간단하다. 실무세계란 그 무엇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지식의 ‘활용’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드는데 많은 지식이 꼭 도움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가 하면, 실제 만드는 데에는 엄청나게 많은 지식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어느 한 사람이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을 수 없으니 지식의 선택과 동원능력, 즉 활용능력이 더 중요하다 .
나는 후배들에게 이 ‘자라기’ 능력에 대해 평소 많이 강조한다. 내가 일부러 상당한 시간을 들여 『자라기』시리즈 책을 쓴 연유도 이러하다. 후배들이 자라기 역량을 습관처럼 익히기를 바란다.
내가 후배를 일할 사람으로 뽑을 때 또는 재목으로 주목할 때 역시 그들의 ‘자라기 역량’이 변수가 된다. 당장 보이는 재주 밑바탕에 숨어있는 빙산을 느낄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상당한 차이가 난다. 당장 일하는데 있어서도, 서너 달 지난 후 본격적으로 일할 때에도, 몇 년 후 일을 독립적으로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크게 차이가 난다.
2. 그러면 대학시절에 자라기 역량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나는 MIT에서 배운 것을 세 가지로 꼽곤 한다. 학교에서 그 누가 강조했던 것도 아니지만 그냥 열심히 그 안에 묻혀서 공부하고 일하다 보니, 그리고 졸업 후 상당기간 일하고 보니 그 당시에 이 세 가지가 나에게 습관적으로 익혀졌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곤 한다.
사실 내가 배웠다는 이 세 가지는 학과에서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교수들이 특별히 입에 담았던 것도 아니다. 다만 여러 학과목들이 전개되는 방식에서, 그들의 연구프로젝트 작업이나 현장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것이다. 나는 이 세 가지를 항상 좋은 자라기 덕목으로 꼽는다.
‘문제를 창조하고, 뿌리 있는 현장의식을 갖고, 무언가 만들겠다는 기업가 정신’을 가져보는 것,
자라기를 자극하는 가장 좋은 촉진제 아닐까.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대학이 ‘현실이 투영된 현장’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시뮬레이션 현장’이라 해도 좋겠다. 현장이라는 체를 통해야 지식과 기술은 비로소 빛을 발휘함을 몸소 겪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3. 우리 대학에서의 교수 역할이란 어떠해야 할까.
참 어려울 것이다.
나로서는 우리 사회에서 한양대에서 한 학기 강좌를 맡아보고 이화여대 초빙교수로서 두 학기 설계스튜디오를 해 본 것이 교수 경험의 전부인데 교수 역할이 많이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2007년부터는 카이스트 미래도시연구소 겸임교수로 한 강좌를 맡고 있는데, ‘인류와 문명: 도시공간을 상상하자’라는 제목의 자유롭고 상상력 가득한 강좌라서 매력적이다.)
교수들의 연구 프로젝트가 그리 활성화된 것이 아니니 실질적인 일을 전개하면서 현장과의 연결을 도모하기도 쉽지 않은 문제도 있다.
그러나 대학의 꽃은 역시 교수다. 교수진을 중심으로 한 지식체계의 축적이 대학 본연의 역할이다. 나는 ‘대학생이 대학의 주인은 아니다’라는 얘기를 학생들에게 하곤 하는데, 이 뜻은 학생은 잠시 머무르다 흘러가지만 대학은 교수를 중심으로 지적 체계, 연구체계를 쌓아올리는데 그 기본 역할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사실 교수들의 연구 활동, 지적 활동이 활발하면 할수록 학생은 그 에너지에서부터 자극을 받고 자연스럽게 자라는 것이 아닌가. 일부러 가르쳐준다고 배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 분위기에 젖었을 때 몸에 익혀지는 것이 자라기 능력이다.
대학의 핵심을 이루는 교수들은 대학의 지적 분위기를 만드는데 책임과 권한이 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지원과 함께 자율도 필요할 것이다. 좋은 학생을 유치하거나 좋은 교수법을 만드는, 소위 ‘교육 서비스로서의 대학’이라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대학의 진정한 역량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수가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근거지가 대학이다.
학생도 자라고 교수도 자라고 대학도 자라고,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도 자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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