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 문자 중독증에 걸렸다. 다른 놀이가 별로 없어서. 뒹굴뒹굴 골방에서 달달 외우도록 수십 번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 『플루타르크 영웅전』, 『공자 일대기』 세 권의 책. 어른용 두툼한 책 속에서 만난 인물들과 인간적 신들의 매력 덕분에 나는 지금도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지도 모른다. 왜 사람은 사람일까? 영원한 궁금증이다.   

그러다가 이미지 중독증에도 걸렸다. 방과 후에는 만화, 주말에는 영화, 밤에는 미술 작품집. 만화는 그나마 허용이 되어서였고, 영화는 관람불가에 대한 반란용, 미술 책은 미술 공부하던 언니 덕분이었다. 건축 일을 그래서 택했을까. 만화가는 되고 싶었지만 자신 없었고, 화가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고, 영화감독은 언감생심 꿈도 꾸어보지 못했다.    

문자 중독증에 더하여 이미지 중독증에 걸린 것은 천만다행이다. ‘문자 + 이미지’라는 일을 택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문자만 다루는 사람이 되었더라면 머리 터지고 가슴 태우는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미지 다루는 사람도 가슴 터지고 머리 태우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손과 몸을 좀 더 쓰니 ‘노동적’이라 좋고 이미지란 좀 더 ‘쾌락적’이라는 것이 좋다. (물론 이것은 나의 편견이다. 문자에서 더욱 짜릿한 관능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제도 있다. 문자와 이미지에 대한 나의 잡식성은 내가 보는 책을 아주 복잡스럽게 만든다. 끌리는 책, 매혹되는 책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탈이다.

그래선지, 나는 ‘한 권의 책’이라는 말을 도통 믿지 못한다. 세상에 어떻게 한 권의 책이 있을 수 있나? 한 사람을 이루는 것이 수백만 수천만의 체험이듯, 수백만 수천만의 체험이 우러나오는 책이란 수없이 많을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직접 체험이 한정적이듯, 그 수백만 수천만 책들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이라는 말의 중차대한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 상황, 그 욕구, 그 의문, 그 갈망, 그 허기에 다가오는 책, 우연이든 필연이든 바로 그 한 권의 책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사람은 꽤 달라질 지도 모른다. 또한 어느 순간에 빠지는 책이란 어차피 ‘그 한 권의 책’이다. ‘그 순간 그 책’에 어떻게 깊게 빠지느냐에 따라 체험의 깊이란 꽤나 달라질 것이다. 책과의 만남 역시 일종의 운명이다.

문자와 이미지를 오가는 나의 중독증, 한 권의 책을 영 믿지 못하는 나의 다독증, 그러나 ‘그 순간 그 책의 마력’을 믿는 나의 책 운명론. 내가 책에 매혹되기는 아주 쉽고 또 아주 어렵다. 어느 책에나 쉽게 매혹되지만 깊이 깊이 매혹되는 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5년 전에 만나 삼켜버릴 듯 읽어버린 책 한 권을 기억해낸다.『Out of Control: The New Biology of Machines, Social System and Economic System』(직역하자면 『통제불능: 기계, 사회체계, 경제체계의 새로운 생물학』) 번역본은 나와 있지 않고 불행히도 번역되지 않을 듯싶다.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500쪽이니 우리 책 만들기 방식이라면 1,000쪽이 넘을지 모른다. ‘생물-지능-물리-철학-경제-경영-사회-심리-정치’ 분야를 넘나드는 책이니 아마 독자층이 적다는 이유로도 번역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이 책을 가져 왔던 친구는 대학원생이었는데 강좌 참고서 중 하나라니, 그런 책들을 부지기수로 독파할 영어권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다. 부피 작고 가벼운 페이퍼백이니 몸에 붙이고 다니기도 쉽고 그런가 하면 내용은 내 온 몸의 세포와 촉수를 건드리는 것 같던 책이다. 한마디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이다.

그림은 하나도 없지만 문자를 통해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책, 여러 세계들을 넘나들지만 그 엄청난 세계를 나의 세계로 느껴지게 만드는 책, 이 끔찍하게 변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책. 이 책은 분명 나에게 마술을 부렸다. ‘그 순간 그 책‘에 깊게 빠지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 나를 강타한 말.

"If you want to create something out of nothing,
forget elegance.
If it works, it's beautiful.
(‘무’에서 뭔가 ‘유’를 창조하려면, 우아함 따위는 잊으라,
작동하면 아름답다.)“

책에서는 지나치는 말처럼 묻혀있지만 나를 강타한 이유. 생명의 본질, 생성의 본질, 복잡 질서의 본질, 창조의 본질에 대한 나의 깊은 의문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헤매고 찾고 들쑤시고 목마르고 허기졌던 그 순간에. 내가 아는, 내가 체험한 모든 문자들과 모든 이미지들이 갑자기 살아나는 듯 싶던 그 순간, 매혹의 순간이었다. 

분명 ‘한 권의 책’은 있을 수 있으리라. 문자와 이미지에 대한 나의 갈증, 나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그런 책을 더 만나고 싶은 것은 물론, 그런 책을 왜 안 만들고 싶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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