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공간 그리고 정치 :: 숭례문과 금각사 - 문화재 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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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지 ‘베개’ 잃어버린 소동

“어머나, 내 베개!” 차는 마산시로 막 접어들고 있었다. 잠깐 눈을 붙이겠다고 뒷좌석에 던져둔 베개를 집으려다가 깨닫고 말았다. 이런, 호텔에 두고 왔구나. 나에 대한 비밀.....

혁신도시, 적극적으로 승계하라

내 그럴 줄 알았다. 이명박 정부는 지역균형발전에 대해서는 참여정부의 맥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정책 이름을 ‘균형발전’에서 ‘지역발전’으로 바꾼다 하더라도, ‘광역경제.....

'딸‘은 완벽하다

나는 딸딸 엄마고 나의 남편은 딸딸 아빠다. 아들만 있는 엄마 아빠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딸의 존재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다. 기를 때 ‘아.....

나라 망신시키는 6가지 요령

요즘 시대에 우리는 누구나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다. 국제외교를 담당하는 외교관뿐 아니라, 해외비즈니스, 유학, 여행 뿐 아니라 해외상품에 대한 구매를 하고 인터넷으로.....

"일본인들이 숭례문이 일본에 있었더라면 불태워지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었을 것이라 했다는(후지TV, 080213) 기사를 봤다. 일본에도 목조건축 문화재 방화 사건이 꽤 있었다. 그 중에 교토의 '금각사' 방화 사건을 소재로 한 유명한 소설이 있다. 이 글은 그 책에 대한 리뷰다. 몇 년 전 <문학사상>지에 실었던 글이다."

이 책은 책을 알아서 읽은 게 아니라 미시마 유키오라는 인물을 알려고 읽게 된 책이다. ‘자살 신화’의 주인공에 대해 파고들어야 할 계제였다. 2001년이었는데 미시마의 번역본은 시중에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우국(憂國)》, 《가면의 고백》, 《금각사》 소설 세 권과 수필집 《부도덕 강좌》 네 권을 구할 수 있었다.

《부도덕 강좌》는 웃음을 터뜨리며 단숨에 읽었다. 정말 뻔뻔스럽도록 ‘나’에 충실한 인간이다. 어떻게 사람의 흉부를 그렇게 도려내나? ‘부도덕’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위악적, 위선적, 본능적, 관능적, 파괴적 욕구를 발기발기 찢어발긴다. 자전적 성장소설이라는 《가면의 고백》은 그리 다가오진 않았다. 그렇게 예민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둔중한 불쾌함이 번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 ‘가면’이라는 코드는 썩 매력적이었다. 《우국(憂國)》에는 감탄했다. 사무라이 칼의 서늘한 빛이 느껴졌다.. 물론 미시마 유키오의 그 충격적 할복 사건을 예언하는 글이라는 것이 상당한 충격이었다. 

***

그러다, 마지막으로 아껴 둔 《금각사》. 왜 아껴 두었는가? ‘건축물’을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그 금각사(金閣寺)? 교토엔 은각사(銀閣寺)도 있다. 발음이 비슷한데, 하나는 ‘긴가쿠지’, 또 하나는 ‘긴카구지’라 해야 한다고 섬세한 차이를 열심히 설명하던 일본 여인네도 생각난다. 그 여인네는 그렇게 신비스럽고 애틋한 사랑을 담아서 ‘긴가쿠지, 긴카구지’를 말했었다.

미시마의 《금각사》는 애모, 질투, 집착, 파멸의 소설이다. 주인공 ‘나’(미조구치)는 승려 아버지로부터 어릴 때부터 “지상에 긴가쿠지보다 아름다운 건 없어”란 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자란다. 긴가쿠지의 수습 중이 되고 언젠가 주지가 될 것이라 촉망도 받지만 방황에 빠져들다가 ‘긴가쿠지는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불 질러 버린다. 이 소설은 실제 1950년에 있던 방화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단다.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와 ‘금각사’와의 심리적 조우를 그리는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였다. 심미안의 발달과 심리적 관계 맺기의 단계가 기막히게 그려져 있다. 아름다움이란 실체가 아니라 심상(心想) 아니던가.  

첫 단계는 ‘실망’이다. 이 세상에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건만, 아버지와 함께 보러 간 긴가쿠의 실제 모습은 별로였던 것이다.

“나는 긴가쿠가 그 아름다움을 감추려고 위장했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27쪽)” 흥미로운 반응도 있다. “연못에는 긴가쿠의 정교한 그림자가 비춰졌는데 그림자 쪽이 오히려 완벽해 보였다(28쪽).” “모형은 마음에 들었다. 오히려 모형이 내가 꿈꿔 왔던 긴가쿠에 더 가까웠다.(29쪽)”

그림자 또는 모형이라는 단순화된 실체에 더 매혹 당하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전혀 심안이 뜨이지 않는 초보 심미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신비화’다. 아름다움의 실체가 보이지 않자 오히려 사모함은 더해지는 것이다.

“몹시 실망을 안겨 주었던 긴가쿠가 야스오카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나 마음속에서 그 아름다움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실물을 대하기 전보다도 더 아름다운 긴가쿠가 되어 있었다. 구체적인 아름다움을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몽상 속에서 자라난 것이 현실에서 바로 잡혀 다시 지난날의 몽상을 자극하게 된 것 같다.(32쪽)”

심미란 심리다.

안타까운 사모는 그 다음 단계다.

“긴가쿠여, 마침내 그대 곁에 와서 살게 되었다” 하고 나는 비질하던 손을 멈추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곤 하였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좋다. 나를 친구로 맞아 주고 그대의 비밀을 보여 다오. 한 발짝 단 한 걸음만 다가서면 확연할 것 같은 그대의 아름다움은 좀처럼 만져지지 않는구나. 긴가쿠여, 지상에서 그대의 아름다움을 능가할 존재는 없다. 왜, 어째서 그대는 이토록 아름다워야 하는가?”(39쪽)

 몸으로는 가까이 다가왔건만 아직 마음으로 가까워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절절하다.

‘사라지므로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는 다음 단계는 아름다움의 ‘절박성’이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 공습이 곧 닥쳐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긴가쿠지 마저 불에 타버릴 것이다.

“이 아름다운 것도 머잖아 재가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자 심상의 긴가쿠와 현실의 긴가쿠는 마치 얇은 명주천 너머로 비치는 그림을 본떠 그렸던 그림을 원본 위에 겹칠 때처럼 서서히 그 세부가 겹쳐졌다. … 긴가쿠는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영원한 건축이 아니라 현상계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것을 변해 있었다. 그러자 현실의 긴가쿠는 관념 속에 살아 있던 긴가쿠 못지 않게 아름다운 것이 되었다.”(49쪽)

‘비극적 깨달음’은 다음 단계에 온다. 교토는 공습을 피했고 긴가쿠지 역시 살아남았다. 아름다움의 ‘불멸성’ 앞에 ‘나’는 부르르 떤다.

“그 어떤 변화와도 상관없이 긴가쿠가 이처럼 견고한 미를 나타낸 적은 없었다! 그 아름다움이 이처럼 눈부시게 빛나기도 처음이었다. 긴가쿠를 바라보고 선  나의 다리는 후들거렸고 이마에는 진땀이 흘렀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완전한 정지, 완전한 고요함이었다. 거기에는 흐르는 것도, 변화하는 것도, 그 아무 것도 없었다. 긴가쿠는 음악에 있어서의 두려운 쉼표처럼, 울려 퍼지는 침묵처럼 그 곳에 우뚝 솟아 있었다.(68쪽)”

 ‘침묵의 음악’으로 건축의 아름다움은 절대적인 존재가 된다.   

이제 아름다움은 ‘절망’이 될 수밖에 없다. 불멸하는 아름다움은 동일화하지 못할 존재, 가까이 하지 못할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버려진 것과 같다. “긴가쿠와 나와의 관계는 이제 끊어져 버렸다. 이것으로 나와 긴가쿠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몽상은 무너져 버렸다. 이제 본래의 상태보다도 더 나쁜 사태가 시작된다 ---

아름다움은 그 쪽에 있고 나는 이쪽에 있다. 이 세상이 계속되고 있는 한 이러한 사태는 결코 달라질 수 없으리라.(69쪽)”

***
말더듬이 ‘나’는 태생적으로 불완전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희구는 있지만 완벽한 아름다움은 항상 ‘나’를 가로막는다. 불멸적으로 아름다운 긴가쿠지는 나와 세상 사이를 가로막는 존재다. 여자에게 다가가려면 여자는 거대한 긴가쿠지로 변해서 나를 불능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덫에 빠지고, 현실에서는 긴가쿠지 주지가 될 가망은커녕 이제 쫓겨날 지도 모른다. 영원히 나를 허용하지 않을 긴가쿠지. 어떻게 해야 할까? 멸망시키는 거다. 멸함으로써 긴가쿠는 다시 내 것이 되고 그 아름다움은 나에게 불멸하리라.   

‘인식의 힘’을 알려주는 사람은 안짱다리 친구 가시와기다. 불구를 신의 선물로 정의해버린 가시와기는 잔인한 방식으로 ‘나’를 교사하는, ‘블랙 데미안’이라고 할까? 《금각사》는 정신의 파괴적 성장을 그리는 점에서 《데미안》의 블랙 버전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던 데미안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렇지만, 《금각사》는 매혹적이다. ‘영원성’(건축물의 인정된 속성)을 깨뜨려버림으로써, ‘스러짐과 파멸’의 미학을 깨닫게 하는 매혹적 작업이다.   

미시마 유키오라면, 내 고교 시절의 그 ‘미친 놈’이었다. 1970년 ‘방패회’ 회원 네 명이 통감부에 들어가 통감을 인질로 하고, 천황만세, 자위대 궐기를 외치고 할복자살한 그 미친 친구다. 그 미친 친구는 ‘파멸적 미학’의 극한적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1959년에 미국에 번역되었다. 《The Temple of the Golden Pavilion》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일본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예찬》(陰翳禮讚, In Praise of Shadow)과 더불어 일본의 공간, 건축, 문화, 탐미주의의 극치를 서구에 알린 책이다.

뒤늦게 읽은 《금각사》, 뒤늦게 그 내면을 발견한 미시마. 일본 문화에 대한 나의 갈등을 더하게 해 준 책이기도 하다. 물론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서도 갈등이 더해진다. 이 책의 마지막은 마치 쉼표와 같은 갈등이다. “나는 담배를 피웠다. 일을 하나 끝내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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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방화를 이 소설의 소재인 사건과 동일시하게 여길 필요도 없고 여길 수도 없다. 단 하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숭례문은 눈앞에서 잿더미가 되었지만 우리 마음속의 상징은 아직도 유효하고 존재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번 사건을 아파하고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분노하며 무책임한 공공권력에 항의한다. 눈에 보이는 물질은 영원할 수 없지만 마음 속 상징과 이미지는 영속할 수 있다. 우리 눈 앞 숭례문은 불타 잿더미가 되었지만 다시금 숭례문은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 속의 긍지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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