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 도서관에서의 생생한 행복감
- Posted at 2009/01/07 11:11
- Filed under 자라기 멘토링/학습-공간
행복감이 생생하던 시간들이 있다.
그 중 하나로 나는 유학 시절 도서관에서 하염없이 책을 뒤지며 보냈던 시간을 꼽는다.
MIT 도시건축학부에는 로치 라이브러리(The Rotch Library)라는 전문 도서관이 있다. 2층, 500여 평 규모다. (아래 사진 둘. 위는 지하층의 공동공간, 아래는 증축한 부분을 밖에서 찍은 사진, 자료출처: MIT. MIT에는 5개의 school-학부가 있는데, 그 중 도시건축school은 작은 편. 따라서 도서관도 작다. 상대적으로 돈도 적은 학부라서 홀대를 받는 편? 이 작은 증축 리노베이션 할 때 디자인 컴페를 해서 안을 골랐다. )
이 도서관은 내가 MIT를 떠난 후 대대적인 증축 리노베이션을 했다. 철골구조로 서가를 밖으로 내밀고 내부를 입체적 공간으로 꾸민 성공적 디자인이다. 처음 갔을 때 신났고 또 놀랬다. 기껏 몇 십 권, 많아야 몇 백 권의 전공 도서만을 봤던 나는 그 많은 책들에 압도당했고 특히 오래된 희귀 문서들이 그대로 존재한다는데 감탄했다.
나중에 시의 공공 도서관, 의회 도서관에 가서는 압도당하는 느낌을 넘어 질려 버릴 정도였다. 지식과 지혜의 빙산 앞에서 작디작아지는 느낌이었다.
이 위축감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상당한 시간투자를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지식의 시스템’을 아는 것이었다. 모듈 코스(module course, 6주 정도의 짧은 강좌)중의 하나였던 ‘도서 분류 워크셥’을 일부러 들어보기도 했다.
어떻게 그 많은 책들이 ‘지식’이라는 나무를 형성하는지, 위로 아래로 자라면서 나무의 뿌리, 줄기, 가지, 이파리, 열매가 되는지 알게 되었다. 맥을 알고 나니 그제야 맘 편해졌다. 역시 큰 맥을 짚을 수 있으면 안심이 된다.
그러나 맥을 짚는 것과 내용을 짚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책은 봐야한다. 그리고 되도록 자유롭게 보는 것이 좋다. 내가 로치 라이브러리에서 특히 행복했던 시간은 매학기 끝난 직후 십여 일간이다. 학기 중에는 수강 필수 독서량이 적지 않고 또 숙제하기 위한 ‘목적성’ 독서가 만만치 않아서 자유 독서를 하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그런데 마지막 시험 또는 리포트를 낸 직후부터 방학 중 일이 시작되기 전 십여 일 사이의 시간은 완전히 자유 독서가 가능한 시간이다. 어떤 책도 내 맘대로 볼 수 있다.
나는 이 시간의 많은 부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개가식의 장점을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 분류시스템이란 참 좋은 것이어서 특정 주제에 대한 책들이 서가 한 부분에 몰려있으니 어떤 책도 꺼내볼 수 있다. 얼마 안 되어서 서가 어디에 어떤 책들이 있는지, 한 주제에 대해 어떤 연구들이 쌓여 있는지 아는 수준이 된다. 좋은 책, 그저 그런 책, 쓰레기 같은 책(미국만큼 수준 낮은 책들이 많은데도 또 없다. 독자층이 넓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만큼 엄청난 책이 쏟아져서일 것이다.), 또 기막힌 책을 파악하는 눈도 뜨인다.
(위 사진은 MIT의 휴매니티 라이브러리. 공간은 별찮지만, 창 밖으로 코트와 찰스강이 보여서 인기 만점. 겨울 사진이 참 낭만적이고, 공부 하고 싶게 만들지 않는가. 아니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마음을 참고 공부에 전념하게 만든다고 할까? 언어학자이자 '미국의 양심' 노엄 촘스키 교수가 있는 인문학부, MIT의 자존심을 지킨다.)
가끔은 다른 전문도서관으로 원정을 갔다. 사회인문 도서관, 과학 도서관, 경영 도서관에 가면 또 다른 종류의 빙산들이 있다. 몇 개의 키워드로 도서카드를 찾고(지금은 컴퓨터 데이터베이스화 되어있어 책 찾는 낭만은 덜하다.) 흥미롭다 싶은 책이 있으면 그 책이 꽂혀있는 서가 주변을 맴돌면서 이 책 저 책 열어보곤 했다. 참으로 끝없는 여행이었다.
(이 사진은 MIT의 바커 엔지니어링 라이브러리. 공학부가 가장 큰 만큼 도서관도 가장 크고, 무엇보다, MIT 중심 건물의 가장 큰 돔 바로 아래 있다. 원형 공간을 아주 재미있게 설계해서 독특한 분위기다. 전통 엔지니어링 학부 학생들은 주로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인지, 이 도서관은 크기에 비해서 한적한 편의 도서관이어서 내가 즐겨 이용했었다. 사진에서 밝게 보이는 것은 서가이고 그 뒤편을 따라 작은 공간들이 있는데, 빠져들기에 그만인 공간이다. 자료 출처: MIT The Barker Engineering Library)
도서관 수준이 취약한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맛을 보기 어렵다.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우리의 경제 발전과 지적 수준의 발전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물론 요새는 대형서점들이 있어서 서점만 돌아봐도 세상에 어떤 지식들이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인벤토리가 풍부해졌다. 그러나 서점은 주로 신간 위주이니 열매와 꽃만 잔뜩 열린 식이어서 뿌리와 줄기를 알기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다. 책이란 체계를 잡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없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지식의 체계를 잡는 것, 이것이 책을 읽는 나의 기본자세다.
책은 보고다. 영원한 보고다.
아무리 인터넷과 데이터베이스 부문이 발달되더라도 책은 ‘지적 리더십’의 역할을 잃지 않을 것이다. 지적 창조의 대상이자 수단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비록 많은 자리를 다른 커뮤니케이션 매체들과 공유하겠지만 ‘지적 리더십’은 책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정보 제공’이라는 의미에서의 책의 기능은 줄어도 ‘지식 생산’ 또는 ‘지혜 생산’이라는 의미에서의 책의 기능은 오히려 커지리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이것은 책이라는 ‘종이’ 세계와 이미지로 이루어지는 ‘모니터’ 세계와의 본질적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글자로 이루어진 책과 이미지로 이루어지는 모니터 세계와의 본질적 차이라면 총괄성과 단속성, 체계성과 즉시성, 추론적 사고와 단정적 사고, 능동성과 수동성 등의 대비적 성격을 들 수 있다. 그만큼 책이란 독자의 통합적, 체계적, 논리적, 능동적인 능력을 요구하고 또한 키워준다.
어떻게 책과 함께 자랄 것인가?
책 읽기보다 더 쉽고 자극적인 유혹이 사방에 깔려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책에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
어떻게 책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 김진애 - 매일매일 자라기
여유롭게 책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어제 "KBS <TV, 책을 말하다> 살려내세요" 포스팅을 하고나니,
이 MIT 도서관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 꺼내 볼 때 참 행복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도 그런 행복을 누리면 좋겠습니다.
우리 도서관들이 온갖 자격시험과 취업시헙 공부하는 '독서실 공부방'처럼 되는 것은 참 아쉽지요. 그렇게 만드는 우리 사회가 문제이지만... 대학 시절의 자유로운 지적 탐구를 충분히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제가 MIT 도서관들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학생들보다 더 교수들이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이었지요. 교수들이 도서관에서 많이 살더군요. 머리 희끗희끗한 교수들이 열심히 공부에 빠져있는 걸 보면 웬지 흐뭇하고 살 맛 났지요. 학교 도서관을 외부 커뮤니티에 공개하는 이유도 작용할 겝니다.
여하튼, '책의 향연장, 도서관' 참 좋습니다.
우리도 동네마다 근사한 도서관, 근사한 북카페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도시들이나 유럽 도시들 처럼. 이렇게 되는 사회가 진짜 선진화된 사회, 풍요로운 사회이겠지요. 꼭 도서관 건물 부터 지으려고 하지 말고, 기존 공간을 리노베이션 하고(위의 MIT 도서관들은 다 리노베이션이지요.) 소프트웨어 책 자체에 공공재원을 투자해주는 게 필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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