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이라는 말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같은 제목으로 그 유명한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
고마카와 준페이의 <인간의 조건>이 있다.

준페이의 소설은 고 3 시절의 유일한 하루 휴가 중 숨가쁘게 읽었다.
말로의 소설은 방황하는 대학 시절에 읽었다.
그러다가 30대에 접어들 시점에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만났다.

유학 중이었을 때이니 1980년대 초반이다. 당시 우리 사회에 전혀 소개된 바 없었던 책이다. MIT 대학의 ‘성찰적 실천’ 성향답게 건축 석사 과정에 ‘인식론’이 필수과목이고(과목 이름은 Design Methods) , 도시계획 박사과정의 ‘계획론’은 철학 출신의 교수들(그 중 도널드 션 Donald Schon이 좌장 역할)이 이끌고 있었다.
건축과 도시는 인간의 실존을 다루는 철학이 바탕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렌트의 책이 내 인생에 드디어 등장하였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돈, 명예, 권력’이라는 인간사회의 세속 기제가 다일까?

아렌트가 추구하는 ‘활력의 삶(viva activa, 또는 생생한 삶)’을 이루는 인간의 조건은 ‘노동(labor), 일(work), 행위(action)’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수고하는 인간, 생산하는 인간, 의미를 소통하는 인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의미를 소통하는 행위, 즉 정치행위다.

아렌트는 ‘정치행위란 언어를 매개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활동’이라 정의한다. 사적인 삶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진행되는 의사소통이다. 바로 ‘진정한 시민의 탄생’ 아닐까?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나의 일과 삶에 의미를 불어넣었다.
왜 도시가 존재하는가, 모르는 사람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모여 살 수 있는가? 이것이 도시의 진짜 목적이자 도시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공성, 공공영역, 시민의 주체적 존재, 의미의 소통’인 것이다.

이 시대의 인간의 조건을 다시 꿈꾼다.

                                                . . . . 경향신문, 책읽기365, 2007.3 



 최근 번역본이 나온 한나 아렌트 전기 표지. 노년의 한나 아렌트 커리커처. 너무 근사하지요? (제가 좋아하는 박경리 선생님 노년 사진 만큼이나 철학이 풍겨나옵니다.)

그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세계애 Love of the World'를 논하는 인간 아렌트. '세계애'는 아렌트의 가장 유명한 개념어이기도 하지요. 'Amor Mundi' 던가요?
사랑은 진정한 고통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박경리 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었지요.


우측 그림은 '건더기미술관'이라는 블로그에서 찾았는데요.(제목이 재밌네요.)  젊은 시절의 한나아렌트 http://solid.or.kr/zbxe/321

한나 아렌트 열풍이 있던데, 혹시 우리나라 분이 그리셨는지 무척 궁금합니다.(저작권이 있을텐데, 여기서 소개용으로 씀으로 양해바랍니다.) 분위기 좋은 커리커처입니다.  


왼쪽: 한나 아렌트의 초-중-노년의 얼굴들
'얼굴은 그 사람을 말한다'고 하지요?


*** 081205 바람부는 새벽의 김진애: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 <전체주의의 기원>과 <정치의 약속>을 다시 꺼내며 영혼을 다시 추스려봅니다.  


위의 글은 '경향신문의 책읽기365'에 2007년 3월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토요일 새벽에 옛 파일을 정리하다가 이 글을 발견하고 갑자기 그 때 그 시절 20대 말에 처음으로 한나 아렌트를 발견했던 그 감동이 밀려와서, 한참동안 한나 아렌트 서핑을 했더니,' 마악마악' 기운이 나는군요.^^ 이렇게 영감을 던져주는 인물을 갖고 있으니 토요일 아침에 저는 행복합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불행복한 상황'이 없습니다. 아니, '무서운 상황'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통렬하게 분석했던 '전체주의의 기원'(아렌트는 나치 히틀러를 피해 파리-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계 독일인입니다.)의 기운이 스멸스멸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의 조건, 즉 소통의 자유, 공공성, 정치의 의미의 싹을 말려 죽이려 하는 이명박정부와 거대여당 한나라당... 언론장악, 무소불위 공안권력, 시민표현의 억압 등, 정말 무서운 상황입니다.

가 읽지 못한 <정치의 약속> 역시 번역판이 나와 있네요. 한번 사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리뷰에 의하면, <전체주의의 기원>과 <인간의 조건> 사이에서 쓴 에세이들이니 한나 아렌트의 생각의 발전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치 현실에 대한 실천의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아렌트 르네상스'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는군요. 아렌트가 던져준 '인간의 조건'이라는 명제, 이 시대에 고뇌해야 할 명제입니다.   

                                      ⓒ 김진애-사람공간그리고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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