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나, 내 베개!”
차는 마산시로 막 접어들고 있었다. 잠깐 눈을 붙이겠다고 뒷좌석에 던져둔 베개를 집으려다가 깨닫고 말았다. 이런, 호텔에 두고 왔구나.

나에 대한 비밀 아닌 비밀 중 하나. 마치 어린아이처럼 여행 다닐 때 내 베개를 들고 다닌다. 베개 깃을 빨 정도로 유아적 버릇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고^^, 그 베개가 없으면 잠을 잘 못 드는 정도다. 장장 20년을 나와 함께 한 베개다.

“쯧쯧, 그걸 왜 두고 와?” 운전하던 남편이 내 부르짖음에 더 놀랐다. 그 베개 사연을 잘 아는 목소리에는 “야, 이거 큰일 났구나. 단단히 괴롭히겠구먼.” 하는 톤이 담겨 있다. “난 잘못한 거 없어.” 절대로 잃어버리는 일이 없는 이 남자의 자기 변론이다. 나도 그렇지, 왜 챙겨 달라고 부탁을 안 했을까? 밤새 차에서 혼자 잔 우리 개 울럼이의 안부가 궁금해서 새벽에 눈뜨자마자 나와서 반가워하는 울럼이와 놀아 버렸던 것이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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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했을 것 같니?” 집에 돌아와 두 딸에게 물었다.

“찾으러 다시 호텔로 돌아갔지.” 엄마 냄새가 그렇게도 좋던 일곱 살 시절, 내 베개 상속 약속을 받아 냈던 막내의 당연하다는 말투다. “땀 냄새, 침 냄새가 뭐 그리 좋으니?” 하던 아빠 구박에도 꿋꿋했고 지금도 사라졌다 싶으면 막내가 이 베개를 안거나 덮고 자고 있다.(통상적인 베개의 3배 크기라 배와 가슴을 덮기에도 제격이다. 이제 나달나달해졌지만 쓸모는 여전히 굳건하다.) 호텔을 떠난 지 4시간인데 다시 돌아가란 말이냐? 그건 말도 안 된다.

“오다가 새 베개를 샀어.” 예전에 베개 가져가는 걸 잊어먹었던 여행길에서 새 베개를 사 왔던 걸 보고 ‘쯧쯧’ 했던 큰딸의 말이다. 그러더니 다른 이야기를 펼친다. “아니, 이렇게 된 거야. 오다가 우연하게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그 호텔에 숙박했다가 놓고 온 베개를 가지고 온 거야. 그래서 찾았어.” 기상천외한 우연의 상상력이라니.

한바탕 웃고 난 두 딸은 이제 현실적이 되었다. “호텔에서 전화가 온 거야.” 그런데 그 호텔은 말이 호텔이지 숙박일지도 안 적는 여관급이다. 우리 남녀의 여행 습성은 끝없이 달리며 놀고먹다가 졸음 올 때쯤이면 적당한 데 찾아서 들어가 자고 새벽에 나와서 다시 달리는 것이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통영에서 거제도로 들어가서 해변을 따라 달리며 해금강을 보고, 장승포에서 해변 언덕의 바람맞이, 노을맞이를 울럼이와 함께 하고 나서는 맛있는 회 먹고 멸치 사고, 대우조선 공장 근처의 퇴근길 정체를 실감하며 옥포의 거의 서울 같은 풍경에 놀랐다가, 이름도 모를 해변 마을을 몇 지나고, ‘덕포’ 해변의 그럴듯한 호텔에 기어 들어가 잠을 잤다. 밤 아홉시에 들어가서 새벽 다섯 시에 나왔다. 호텔 이름도 모른다.

“아빠는 ‘잊어버려야지, 뭐.’ 그랬겠지!”
“그런데 엄마가 포기할 리가 없지!”
두 남녀의 본성을 꿰뚫고 있는 딸들의 멘트다.

그렇다. 나는 ‘114 전화번호 안내’로 전화를 걸었다. 이름도 모르는 호텔을 어떻게 찾냐고? “거제도 ‘덕포비치호텔’요.” 해변에 있으니 ‘비치호텔’일 듯싶었고, 덕포에 있으니 ‘덕포비치호텔’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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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런 이름의 호텔이 있었다. 전화번호를 돌려서 확인한 것,
“해변에 지붕 동그란 호텔 맞나요?”
호텔의 모양을 새겨 둔 내 훈련된 눈썰미가 들어맞았다. 가장 중요한 단서였다. 방 번호는 정확히 기억한다. 복도에서 헤매다가 입에 방 번호를 붙였었기 때문이다.

“간밤에 508호에서 잤는데요. 뭘 하나 두고 왔거든요?”
“뭔데요?”
 쪽팔리는(?) 기분으로 “저, 베갠데요...”
“베개요?”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당혹한 듯한 목소리.
 
“원래 호텔 거 두 개 말고 하나가 더 있을 거예요.
워낙 정든 베개라서요. 우리 아이들도 좋아하는 베개거든요.”
정을 듬뿍 담은 목소리를 내려고 애를 쓰는 나의 이 안타까운 몸부림이여! 아직 방청소 전이라 모른단다. 찾아서 수취인 부담으로 택배로 부쳐 달라고 부탁을 했다.

오후에 다시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 목소리가 아침과 다르다. 대뜸 하는 말, “얘기는 들었는데요, 베개 없어요. 간밤에 508호에는 사람이 안 잤어요.”
(이 대목에서 얘기를 듣던 막내딸이 갑자기 새파래졌다. ‘그럼 귀신이 잤단 말이야?’ 하는 납량특집적인 표정이라니^^.)
“저희가 밤에 들어가서 새벽에 나왔는데, 어떤 젊은 아저씨한테 열쇠 받고 열쇠 주고 왔거든요?” 나는 자초지종을 얘기한다.
아줌마는 요지부동이다. “아무도 안 잤어요. 장부에 안 적혀 있어요.” 이때 핸드폰이 뚝 끊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 이 호텔이 아닌가? 방 번호가 틀린가? 귀찮아서 모르는 척하나? 혹시 그 젊은 아저씨가 장부에 안 적고 숙박료를 슬쩍한 걸까? 새벽에 우리가 나오자마자 방을 깨끗하게 치운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내 베개는 지금 어디에 있지? 갑자기 쓰레기통에 쑤셔 박힌 베개, 바다에서 익사했거나 불태워져 버린 내 베개 모습이 떠오르며 내 머리가 쑤셔 박힌 듯, 익사하는 듯, 불타 버리는 듯한 아픔이여. 영화를 봐도 너무 많이 봤나 보다. 다시 돌아가야 하나? “베개야, 미안해.”

다시 핸드폰이 연결되기까지 15분 동안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전화가 연결되자, 그 아줌마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던지 접수받은 사람이 어떤 인상착의인지, 숙박료를 얼마 치렀는지 묻는다. 밤에는 경비 겸 남자 아르바이트를 쓴단다. “오늘 밤에도 일하시나요? 꼭 물어봐 주실래요?”
나는 필사적이 되었다. 조금 있으면 현상금이라도 걸 판이다.

갑자기 아줌마가 다른 아줌마를 바꿔 준다. 이건 또 왜 이러지? 아침에 전화 받았던 목소리다. “베개 찾았어요.” 안도의 가슴이여. ‘고맙습니다’를 몇 번 하고 꼭 부쳐 달라 몇 번 하고, 나는 푸근한 마음으로 해인사를 거닐며 부처님께 감사의 절을 여러 번 올렸다.

며칠이 지나도록 베개는 오질 않는다. 다시 전화를 걸자 또 다른 목소리. “그 베개 얘기 들었거든요. 부쳤는지 아닌지 잘 모르고요. 안 부쳤으면 내일 꼭 부칠게요.” 피식피식 웃는 기색이 완연하다. 내 말이 길어질까 봐 걱정인지 따발총으로 얘기한다.

다시 이틀 뒤, 거제도 토종 ‘멸치 박스’에 싸여서 깃털처럼 가벼운 베개 박스가 도착했다.
아, 내 베개! 도대체 이 베개는 나에게 무엇인가? 정신 감정이라도 한 번 받아봐야겠다. 베개와 나와의 관계, 베개를 통한 나와 가족과의 관계, 베개에 대한 사람들의 연상 작용, 베개라는 물건의 중차대한 의미를 나는 새삼 깨달았다. 아주 유용한 ‘덕포 베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 내내 내 베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080303 일요일 아침 김진애 생각

여러분께 드리는 저의 휴가 서비스 이야기 입니다. 휴가지에서 벌어진 소동 누구나 한 두가지 갖고 있으시지요?

위에 적은 사건을 생각하면 항상 웃음이 터집니다. 남들은 아무것도 아닌 소동이라고 여기겠지만 본인에게 너무 중요한 것을 잃고 다시 찾은 사건은 정말 각별하답니다. 헛소동도 그런 헛소동이 없었지요?
그 베개는 지금도 저랑 같이 한답니다. 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같이 할 것 같답니다...^^

지난 주 저도 휴가였습니다. 정말 무덥지요? 다음 주까지가 휴가 피크이겠지요. 다음주는 장마비도 그쳐서 바짝 더운 휴가가 되겠군요. 좋은 시간을 보내십시오. 가능하면 비용 적게, 가능하면 스트레스 덜 받는 방식으로. 요새 휴가도 만만찮은 스트레스이니까요... 국내 휴가가 많이 늘었다니 고유가시대, 고물가시대를 실감하게 됩니다. (남이 잘 안가는 작은 곳을 찾아보세요. 사람도 적고 물가도 상대적으로 싸고, 무엇보다 극성스러운 상혼에 상처받지 않아서 좋지요. 거제도는 곳곳에 작고 조용한 곳이 많지요. 덕포도 그 중 하나입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 나라, 워낙 좋은 곳이 구석구석 많답니다.)

요새 워낙 스트레스 높은 사건들이 많아서, 뉴스 안듣는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휴가가 되지요. 갔다오고 나서가 문제지만요... 오늘 일요일 까지 저는 책읽으며 요리해먹으며 쉬엄쉬엄 보내렵니다. 더위 이겨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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